엄마라는 존재는 참 오묘하다.
사람들이 그랬다.
엄마가 되어보면 엄마의 마음을 안다고.
그런데 두아이를 키우고, 마흔이 넘은 지금도 엄마의 마음을 정말 모르겠다.
심지어 엄마도 나를 정말 모른다는 생각을 곧잘한다.
그리고 그것이 서운해서 화를 낼 때가 많다.
왜 그럴까 곰곰히 생각하다 나는 엄마와 나의 관계를 하나하나 되새김질 하게되었다.
나의 어린시절에 엄마는 아침밥을 해주고 아빠와 일터로 나가셨다.
그리고 낮동안에 나는 벗과 자연을 벗삼아 뛰어놀다 집으로 돌아와 티비를 보고
일터에서 돌아온 엄마가 해주신 밥을 먹고 각자의 방에서 놀다 잠이 들곤했다.
아침과 저녁은 꼭 부모님과 한상에 앉아먹던 습관은 밥상머리교육은 확실하게 되었으나
엄마와 진득이 앉아서 대화라는 것을 해본 기억이 별로없다.
엄마는 대농을 짖는 농부의 아내로 농사에 필요한 식솔을 챙기기에 늘 분주하였고,
대가족과 종친들의 맏며느리로서 몸이 열개라도 부족한 하루하루를 살아내었다.
내가 보는 엄마는 늘 종종거리며 살림을 일구셨다.
그런 엄마의 가사일을 도울 때도 엄마는 수다를 떠는 편이 아니었다.
일을 지시하거나 일머리를 가르치긴 했어도 엄마의 속내를 들어본 기억이 별로없다.
내가 배운 것들은 엄마의 행위로서 익힌 것들이다.
칼국수를 면을 뽑는방법, 김장을 하는 것, 청소하는것, 세탁기를 돌리는방법, 칼질하는 것 등등
소소한 행위는 엄마가 시킨 심부름을 해나가면서 배워나간 것들이지 엄마가 말로 조근조근
가르쳐 주신 또한 거의 없었다. 엄마의 못짓 손짓을 보며 등너머로 배워야만 했다.
자세히 가르쳐준적도 없지만 잘못할때면 거친 잔소리를 들어야 했었다.
중.고등학교때는 내가 친구들과 놀고, 공부한다고, 교회간다고
새벽에 나갔다 밤늦게 들어오는 일상들이었으니 대화 할 기회는 더욱 없었다.
기껏해야 아침마다 준비물이 뭔데 얼마가 필요하다. 학원가고 싶다. 문제집을 사야한다.
교복이 떨어졌다. 신발이 떨어졌다. 소풍갈때 입을 옷이 없다. 이런류의 실랑이가
내 청소년 시절 엄마와의 대화의 대부분을 차지하였던 것 같다.
농사를 짖는 부모의 농사를 도와주러 일터에 가서 일을 도울때면 엄마는 다른 어르신들의 이야기를 듣는편이었고, 대부분은 라디오소리를 들으면 손만 분주했던 시간들이 더 많았다.
아주 가끔 가뭄에 콩날 듯이 엄마의 어릴적 이야기를 듣거나, 엄마의 개인적인 이야기를 들을 때면
굉장히 신비로운 이야기인듯 흥미를 느끼긴 했지만 엄마는 그런 이야기도 자주 해주지 않았다.
그녀는 삶을 살아내느라 무진 바쁘고 힘겹게 하루를 살아내었고
나는 그녀의 그 힘겹게 살아내는 몸짓에 짖이겨지지 않기위해 '맘에드는 딸'이 되고자 노력하는 시간들이었다.
그렇게 살다 나는 대학을 가면서 자취라는 것을 시작했고 그제서야 비로소 나만의 라이프스타일을 만들어 나갔다.
혼자 살게 되고서야 비로소 나는 나를 들여다 볼 수 있게 되었다.
내가 어떤 것을 좋아하고, 어떤 시간을 좋아하고, 어떤 음식을 좋아하는지 비로소 알게 되었다.
고등학교 이전의 삶은 엄마와 아빠가 제공한 것들을 누리는 삶이었기에 나의 선택이라는것이
굳이 필요하지도 않았고, 그 선택이 크게 불편하지도 않았었다.
그러나 내가 독립을 하고나서 부터는 모든 순간순간이 나의 결정으로 나의 하루가 설계되었다.
혼자가 되고 나서야 비로소 내가 좋아하는 것이 무엇인지 알아가는 과정이었다.
근데 그것은 내가 부모와 함께 살면서 알게되거나 깨닫지 못했던 것이다.
그래서 시간이 흐르면 흐를수록 나는 엄마가 나를 모른다는 생각을 지배적으로 하게되었다.
특정한 예가 엄마는 장어국을 내가 엄청 좋아한다고 생각하셔서 내가 시골에 내려가는 날이면
장어를 사다가 뼈를바르고, 시래기를 삶는 수고로움을 하시면서 무더운 여름에도 장어국을 끊여내시곤 했다.
분명 엄마는 내가 장어국을 좋아한다고 느낄만큼 맛나게 먹는 몇번의 장면을 기억하는 것일테다.
사실 20대 때 몇번은 나는 장어국을 좋아하는건 아니고, 엄마가 해주니까 맛있게 먹는것이라고 이야기를 했지만
엄마는 '너는 장어국을 좋아해'라고 말하시고는 여전히 내가 갈 때마다 장어국을 끊여 내시는 엄마를 보면서
'그래 아무렴 어때 내가 맛있게 먹으면 되지'라고 생각했고
그담부터는 맛있게 먹는것에 집중했다. (더이상 내가 장어국을 좋아하는게 아니라는 설명을 하지 않았다)
나는 전화를 자주 하는 살가운 딸이 아니라서 시시콜콜하게 내 이야기를 하는 딸이 아니고
엄마는 걱정과 염려가 많기는 해도 역시 살가운 엄마가 아니라서 시시콜콜하게 엄마의 이야기를 하는 엄마도 아니다.
그저 누가 들어도 괜찮을 보편적인 안부와 보편적인 일상보고같은 통화를 할 뿐이다.
그러다 보니
가끔 생각과 사상, 삶의 방향에 대한 이야기를 할 때면 엄마의 생각과 내 생각이 확연히 다른걸 느끼게 되었다.
하지만 장어국처럼 엄마의 생각에 동의하기 어렵지만 거부하지 않고 엄마의 잔소리 같아보이는 생각들을 들었다.
사실 몇번은 '내 생각은 그렇지 않다' 몇번은 말해보았지만 그럴때면 '그러니까 니가 안되는거야'라는 소리를 들어야 했다. 그러다 보니 언젠가 부터 나는 '그저 엄마의 목소리를 듣는 사람'이 되어갔다.
수화기 너머로 들리는 나의 반응은 '영혼없는 대답'이었을 것이고 그럴때면 엄마는 '대답만 잘하는 헛똑똑이'라고 하셨다.
신앙에 있어서도 마찬가지이다.
내가 가장 힘겨운 것은 신앙과 일치하지 않는 엄마의 삶이었다.
그래서 우스갯소리로 나는 가끔 전화를 걸때 "김권사님~"하고 전화를 걸었다.
그리고 가끔 엄마가 성격을 드세게 날을 세울때면 "김권사님~ 어디가셨어요~?" 라며 놀렸다.
한없이 자애롭고 인내심 강하며 강인한 여성상의 김권사님은 자식에게 염려가 많고,
걱정과 시름이 온 삶을 지배하시는 분이시다. 하나님으로 부터 평온하지 않으셨고,
하나님이 주시는 참 평안이 엄마에게 있지 않는 것 같았다.
하나님께 자녀를 맡긴다는 것이 무엇인지 모르는 것 만큼의 무게로 자녀를 걱정하고 염려했다.
물론 그 걱정과 기도로 내가 살아온 것을 부인할 수 없지만
나는 무엇보다 엄마가 하나님안에서 평안 하기를 바라고 또 바랬고,
다 큰 자식을 때문에 삶이 불행하다 여기지 않기를 바랬다.
엄마의 삶이 누구때문이 아니라 하나님으로 인해 행복하시기를 바랬으나
언제나 수화기 너머로 들려오는 엄마의 삶은 지치고 피곤하고 염려가 가득한 하루라는것이 안타까웠다.
부모와 18년을 함께 살았고, 부모가 없이 25년째 살아가고 있다.
그러나 여전히 부모의 그늘아래 나는 있다. 그녀의 한숨과 걱정과 염려로 나를 곧추세워나가며
그녀가 바라는 딸로 살아내려 무던히 애쓰고 살아가고 있다.
최근까지 성인으로서 내가 만들어온 나의 삶의 방식은 어머니가 알던 내가 아닐수도 있다는 생각을 해주기를 바랬던것 같다. 그러나 이제 칠순을 바라보는 엄마에게 더이상 '나'를 인정받으려 애쓰는것을 그만두기로 했다.
그냥 장어국처럼 나는 엄마가 생각하는 내가 되기로 작정했다.
뭐 내가 생각하는 '나'라는 존재를 엄마가 모르면 어떤가
엄마가 그렇게 생각하는 나로 사는 것도 나의 삶의 일부일 것이다.
장어국을 내가 싫어하지도 좋아하지도 않는 것 처럼.
앞으로 사시면 얼마나 더 사시길래 나를 알아봐 달라고 징징거리겠는가.
그냥 내가 장어국이 되면 되는 것을...
어느 대기업 회장님도 어머님앞에서는 등짝 스매싱을 맞는 코찔찔이 아들에 불가했던걸..
한여름이면 엄마는 아직도 냉동한 장어국을 얼려보내신다.
그러면서 꼭 한마디하신다 '언니도 오빠도 안주고 너만 넣었다' 라든가
'오빠랑 언니는 두개주고 너는 세개 넣었다' 라든가..
그것이 엄마의 사랑방식이다.
그것이 장어라는 것보다,
니가 좋아하는 것을 더 챙겨 넣으셨다는 엄마의 마음을 기억하기로 한다.
그저 감사 할 따름이다.
내가 기억할 것은 장어국이라는 물체가 아니라 엄마가 나를 사랑한다는 마음이다.
엄마가 다른 자식보다 아픈손가락으로 나를 대한다는 그 자체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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