생각주머니 08. 수능 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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생각주머니

생각주머니 08. 수능 날

by jejetiti 2024. 12. 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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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수능일인 내일은 영하권 추위가 찾아옵니다.

오늘 밤사이에는 기온이 무려 10도 이상 내려가
영하권에 머무는 곳이 많겠는데요.

서울을 비롯한 중부 일부 지역에는
오늘 밤 11시 기준으로 한파특보가 발효됐습니다.

내일 오전 서울과 세종 -6도, 파주는 -8도까지 내려가고
전남 일부지방에서는 폭설이 예상됩니다.
각별히 날씨에 신경쓰셔야 할 것 같습니다. "



어젯밤 저녁뉴스에 흘러 나오던 뉴스는
엄마의 잔소리 기폭제가 되어 귀가 쉴틈이 없었다.

"하~ 큰일났다~ 눈이 겁나게 왔다.
내복챙겼냐, 시험보는데 춥다고 덜덜떨면
알던 것도 틀린다. 그리안해도 긴장될텐데 ..."

"돕바입어라! 저기 꺼내놨다"

"오늘은 추워서 얇게 입으면 안된다~
목도리도 단단히 챙기라.
양말 두개 신을래?"

"밥 너무 먹지마라 또 체하면 큰일난다~"

그리 안해도 아침부터 계속 이어지는 엄마의 잔소리로
밥이 코로 들어가는지 목구멍으로 넘어가는지
알길이 없었던 차였다. 그만 숟가락을 내려놓았다.

"아빠는?"

수능시험장에 데려다 주기로 한 아빠가
아까부터 보이지 않아 불안하던 차였다

"아 밥먹고 천천히 해도 된다는데
차 데펴야 한다고 아까부터
차고에 내려가싯다
아빠기다린다 서둘러라~"

"아, 벤또는 보온통에 쌌다,
너무 추우면 국물부터 한모금 마시고
밥떠라, 알겠지?"

교복 위에 점퍼를 걸치고,
책가방 속에 도시락 통을 쑤셔넣고
신발에 발을 구겨넣으며 서둘러 현관을 나섰다

"뎅기올께"

"하나님께 꼭 기도하고,
내게 능력주시는자 안에는 내가 능치 못함이 없느니라.
말씀 똑띠 기억하고, 서두르지말고,
아는 것 실수하지않게 해주시라 기도하고 시험쳐라"

현관문을 나서는 뒤통수에도
걱정이 가득 담긴 잔소리가 날아 들었다.

계단을 내려서자 지하실 차고지 앞에
아빠의 1.5톤 포터차량이 시동이 켜진 채
차창에 습기가 가득 차 있었다.

차 문을 열자 아빠가 어색하게 빙그레 웃으시며
눈짓으로 올라타라고 말한다.

늘 일터로 나가시는 아빠의 더러운 포터차량이
깨끗하게 세차를 했건만 밤새 온 눈으로
세차의 흔적은 찾아볼 수 없게 되었다.

잡다한 공구들과 잡동사니가 널려있던 차 안이
말끔하게 정리되고, 보조석엔 방석도 깔려있었다.
차 안은 덮여진 공기가 훈훈했다.

눈 밟힌 신발을 털고 차에 올라탔다.

"안전벨트 메라"

말이 끝남과 동시에
아빠는 클러치에서 발을 떼고 기어를 넣고
엑셀로 발을 옮기자 차가 미끄러지듯
대문을 빠져나갔다.

눈이 발목까지 찬 동네 어귀를 나서 큰 도로로
들어서자 녹은 눈들이 질척거리는 소리를 내며
자동차 타이어 사이로 삐져나가며 길을 만들어냈다.

아직 어둠이 채 가시지 않은 새벽녘
눈은 그치지 않고 여전히 내리고 있었다.

아빠랑 단둘이 차를 타 볼일이 없어서였을까?
마땅히 할말이 생각나지 않아
침묵과 적막이 흘렀다.

언제나 농기구와 짐들을 실어나르던 아버지의 차,
작업복을 입지 않은 아버지의 평상복차림
깨끗하게 정리 정돈 된 차안
따뜻한 히터가 빵빵하게 나오는
모든 것이 낯설고 어색했다.

"필요한건 다 잘 챙겼어? 수험표랑?"

"응"

"그동안 고생했으니 준비한 만큼만 하면 돼
살수만 안해도 돼 !"

"응"

시험장 근처에 다다르자 분주하게 오가는 경찰차와
경찰 호루라기의 호로록소리,
교통정리하시는 순경들과
시험장으로 자녀를 실어나르는 차,
오토바이를 타고 오는 수험생들로
수험장 학교 주변이 꽉 막혀있었다.

"입구가 막혀서 저쪽 골목으로 돌아가야 겠다"
전날 사전답사를 하며 혹시 모를 골목길을
미리 외워뒀던 아빠는
능숙하게 혼잣말을 되뇌이고는 차를 돌려나갔다

그리고는 차 한대가 겨우 지나 갈만한 골목으로
차를 운전했다.
200미터쯤 골목을 운전하고는 약간 여유가 생긴
공터에 차를 세웠다.

50미터 앞쯤 시험장 입구에는 엿파는 장수부터
찹쌀떡장수들이 진을치고
교문앞쪽으로는 인근학교 후배들과 선생님들이
들어오는 수험생들에게 응원 플랜카드를 들썩이며
"시험 잘보세여" "수능 대박나세요"
응원의 소리들을 외쳐대며, 따뜻한
보리차를 대접하고 있었다.
수험생들을 부끄러운 듯 가방을 멘 어깨끈을
다잡으며 고개를 숙인 채
빠르게 수험장으로 사라져갔다.

시험장은 8시 10분까지 입실하면 되는데
담임 선생님께선 전날 7시 50분까지는
들어가라고 안내를 해주셨다.
그럼에도 무려 30분이나 이른 시간이었다.

차가 멈추자 안전밸트를 풀고 차문 손잡이에 손을 올렸다.

그때

"잠깐만 기다려봐"

하고 아빠는 차에서 내리셨다.

'뭐지?'

라고 생각하는 순간

아빠는 학교 앞 골목에 세워진 초록색 커피자판기에
동전을눌렀다.버튼을 누르고 계셨다.

외투를 입지않아 발을 동동거리며
커피가 내려오길 기다렸다가
김이 모락모락 피어오르는
커피한잔을 들고 차에 올라탔다.

"이거 커피야, 따뜻할 때 한잔 마시고 들어가"

내 앞으로 쓱 커피를 내밀었다.

집에서 몰래 엄마의 맥심 믹스커피를 타먹어 보긴했지만
'애들이 먹는거 아니라' 못 먹게하던 커피를
아빠가 쓱 내미실 때 그 이상한 기분은 뭐라해야할까?

뜨거운 커피를 후후 불자
안경에 습기가 가득 차 올랐다.

뜨거운 종이컵의 커피 온기가
고스란히 손가락에 전해졌다.

그날 마신 커피가 썼는지 달았는지 모르겠다.
그저 어색해하며 어떻게 마셨는지 모르게 마셨다.

다 마시자 아빠는 손을 내밀어 빈 종이컵을 받아들었다.

"긴장하지말고 잘 보고와, 끝나고 여기서 기다릴께"

"끝나고도 기다린다고???"

시험끝나면 급할 것도 없는데,
친구들과 버스타고 가면 된다고 생각했는데 뜻밖이었다.

"응 알았어"

대답하고 차문을 열고 깡충 뛰어내렸다.

아빠도 차문을 열고 나왔다.

"추운데 들어가, 나 갈께"

나는 가방을 고쳐메고 시험장있는 학교 교문을 향해
걸어갔다.

뒤꼭지에 아빠의 시선이 있는 것만 같아서
가방을 멘 어깨마저 어색하게 느껴졌다.

그러다 교문 앞에 다다라서 차가 세워진
골목쪽을 돌아봤더니
눈이 마주친 아빠는 손을 세차게 흔들었다.
처음보는 아빠의 모습에
피식 웃음이 났다.

나도 손을 들어 크게 흔들었다.

입가에 미소가 가득찬 채 수험장으로 들어섰다.

내 수험번호를 찾아 교실에 들어서자
7시40분 밖에 되지 않았는데 몇자리를 빼고는
거의 자리가 다 채워져 있었다.

교실 안은 지우개 가루가 떨어져도 소리가 들릴만큼
적막한 채 사각사각 볼펜굴리는 소리들과
샤라락 종이장 넘기는 소리만 군데 군데 났다.

자리에 앉기 위해 의자를 빼고, 가방을 내리고
지퍼를 내리는 모든 동작에서 들리는 소리가
내 귓가에만 확성기 소리처럼 크게 들리는건지
한참을 뽀시락대는 나의 소리가
스스로도 거슬릴 지경이었다.

자리를 정돈하고 앉아 주변을 쓱 둘러보았다.

제 각각의 긴장한 표정들이었지만
주요 썸머리라도 정리한 듯한 노트를 들고
무엇인가 외우는 듯 입모양으로 중얼중얼 거리거나
연필로 메모한 것에 동그라미를 쳐가며 되새김을 하거나
기출 모의고사지를 넘겨보는 등
이미 하루 전부터 이곳에 있었던 사람들마냥
익숙하게 시험장과 동화되어 있었다.

어색함으로 주변을 두리번거리는 건 나 혼자였다.

나는 복도 너머 창가를 바라보았다.
여전히 교실을 찾아 들어서는 아이들이 복도에 한둘씩
스쳐지나갔고, 그 중 몇은 우리교실로 들어섰다.

그 아이들도 나만큼이나 어색해하면서
조용히 하려 애쓰며 자리를 정돈하고
필기구를 책상 위에 올렸다.
손목시계를 풀어 책상 위에 올려놓거나
연필, 지우개, 컴퓨터용사인펜, 자 같은 것을 올려두었다.

종소리가 울리고 시험지를 든 감독관
두명이 교실로 들어섰다.

"책상 위를 모두 정리하고,
필기구와 수험표를 올려놓습니다."

수험표검수와 시험지배부가 끝나고
8시30분 드디어 시험이 시작되었다.

 



1교시 언어영역 내가 가장 자신있어하는 과목이다.
쓱 시험지 전전체를 훝어보는데, 지문이 너무 길다
한 페이지를 넘는 지문이 수두룩했다.
보통 언어영역 시험지가 16~17면인데,
이번 수능은 언어영역이 19면이다.
지문이 길다는 것은 시간이 부족하다는 뜻인데?
그러면 지문을 다 읽을 시간이 없다.

일단 전체 지문을 쓱 눈으로 훝고
문제를 읽은 다음 문제에서 해당되는 지문을 찾아
올라갔다. 문제를 읽을 때 옳은 것인지, 그른 것인지,
다른 것인지, 맞는 것인지, 올바르지 않는 것인지
질문을 제대로 파악하는 것이 중요하다.
대충 읽다가 잘못 체크하는 경우가 많으니까.
또 남은 지문이 정말 답이 될 확률이 없는 것인지
골라내는 것도 중요하다.
신중하고 꼼꼼하게 시험지를 풀어 나간다.

다행히 '신석정의 아직은 촛불을 켤때가 아닙니다'와 '윤동주의 별 헤는 밤'이 나온 문학 시편은 다 아는시라서 지문을 읽지 않고 풀 수 있어 시간을 벌었다.

그 다음 이어지는 변영로, 최남선,최익현의 기행기들도
다 아는 지문이다. 지문 두개를 읽지않고 문제를 풀수있는건 행운이라 생각하며 감사한 마음으로 문제에 더 집중할수 있었다.

다음 장의 지문도 '말의 순화'라고 어렵다고 생각해서 모의고사 때 집중해서 지문을 파고 들었던 부분이다.

그 다음 지문은 최만식의 태평천하..
문학작품에 공들인 결과다
지문을 무려 네개나 얻은 것에 감사함이 몰려온다.
문제를 더 꼼꼼히 읽고 크로스 체크하며 지문과 문제를 넘나들며 풀어나갔다.

그런데 너무 에너지가 몰렸다
그 다음 지문은 '왜놈 격노'에 대한 옛글인데 글이 읽히지 않았다. 머리속에 읽고 정리가 되어야하는데 읽다 멍해지곤 다시 앞으로 돌아가 다시 읽고를 반복하며 시간이 흘러간다. 애가 타 문제를 먼저 읽어보는데 이건 지문을 읽지않고는 풀수가 없는 문제이다.

진땀이 나기 시작한다.

찬찬히 정신을 가다듬고 지문을 읽으며 문제를 풀어나간다 왠지 자신이 좀 없다.

그리고 얼마나 지났을까..

"십분남았습니다."

'아뿔싸'

지문2개, 시험지 세쪽이 남았는데 10분이라니, 아직 마킹도 제대로 안했는데..

이젠 어쩔 수 없다. 지문을 포기하고 문제만 읽고
꼭 지문이 필요한 것을 올라가 훝으며 문제를 찍다싶이 풀어냈다.

검토 할 시간도 없다.
아는 지문에 시간을 벌었다는 생각에 문제를 너무 꼼꼼히 풀은 탓이다.

고등학교시절 3학년 내내 언어영역을 시간이 부족해서
풀지못했던 적은 단 한번도 없었다.
너무 당황해서 손이 떨리는 것 같았지만
정신을 가다듬고 컴퓨터용 사인펜으로 마킹을 해나갔다.
틀리지 않게 꼼꼼하게 번호를 체크하고 다시 한번
시험지와 답안지를 맞춰보는 와중에 끝나는
종 소리가 들렸다.

"자 시험을 중단하고 모두 손을 머리에 올립니다.
손을 내리거나 움직이는 사람은 부정행위로 간주합니다"

채 다 검토하지도 못한 답안지를 보는 눈에 습기가
차올랐다.

이런 적은 단 한번도 없었다.

갑자기 교실 온도가 더 떨떨어지기라도 한 듯
한기가 몰려오며 몸이 부들부들 떨려왔다.
너무 춥다..몸이 내맘대로 멈춰지지 않고
달달거린다. 진정하려고 발을 들썩여 본다.

마치 화장실이라고 가고 싶은 사람처럼..

답안지가 다 걷히고 감독관이 나가자
몇몇은 빠르게 다음시간을 준비하려는 듯
메모장을 꺼내거나,
화장실을 가거나 제각각 할 일을 했다

나는 정신이 몽롱했다.
어이가 없고 당황스러움에 어찌할 바를 몰라
떨려오던 손은 진정이 되지 않는다.

언어영역시험지를 뒤적거려보지만
눈에 들어오지도 않는다.
그럼에도 미련이 남아 자꾸 마지막 지문들을 읽어본다.
글자가 머리에 박히지 않고
낱알이 흩어져 한글자 한글자
동동 떠다니는 것만 같다.

어차피 수포자라 수학은 준비할게 없다.
화장실은 딱히 가고 싶은 생각이 없다.
분노인지 당혹감인지 알수없는 파괴된 정서는
자꾸 추운 것마냥 몸이 덜덜 떨리게 했다.

그렇게 20분의 쉬는 시간이 지나고
2교시 가 시작되었다.
나는 완벽한 수포자다.
그러나 모의고사 때도 최선을 다해서 풀고,
아는거라도 틀리지 않으려고 애썼다.
시험지를 뒤적거려 집합, 도형, 전개도, 확률, 표준편차 등 대체적으로 쉬운 문제들을 먼저 풀어나갔다.
한참 열심히 풀고있었다.

"10분 남았습니다"

나는 서서히 눈을 떴다.

눈을 떴다고??
내가 잔거야??
시험시간에??
미쳤어??

모의고사 때도 단 한번도 해보지 않은
시험시간에 잠이라니~

그것도 시험지를 푸는 것 마냥 볼펜을 들고
고개를 든 채 나는 졸고 있었다

얼른 시험지를 봤다.
이제 겨우 21번을 풀고 있다니..
나는 생각 할 겨를도 없다.
문제를 봐도 어차피 풀시간도 없고 풀 능력도 없다.
답안지에 그냥 번호를 마킹했다.

언어영역부터 시작해서 수리영역까지..
나의 운명은 여기에서 끝인가..싶은 절망이 밀려온다.

점심시간

모두 자리에 앉아 도시락을 꺼내 먹는다
나는 밥이 도무지 넘어가지도 않고..
밥맛도 없다.
그래도 배가 고프면 시험볼 때
정신이 산만할까싶어 국물을 마시며 몸을 데워본다.
엄마가 밥 사이에서 껴둔 달걀후라이를
국물에 적셔 꾸역꾸역 밀어넣는다.

반찬이 무엇이었는지 기억이 나지 않는다.
국물과 달걀후라이에 밥을 몇숟갈 떠먹고는
도시락 뚜껑을 닫았다.
수탐에서 내가 건질 건 생물, 사회, 지구과학,
도덕, 역사다. 물리와 화학은 포기한지 오래고
아는 문제라도 틀리지 않으려면
써머리를 다시 한번 봐야한다.

얼른 도시락을 정리하고 공부를 시작했다.
시험장은 점심 시간인지 알수없게
다시 적막이 흐르고 사그락거리는 소리만 가득했다.

평생 해본적 없는 행동을 두 가지나 해버린 나는
아무리 써머리를 읽어보려해도
머리속으로 글들이 동동 떠다니는 것만 같고
제대로 머리 속에 박히지가 않았다.

수탐영역은 그래도 정신을 단단히 부여잡고
아는 것들을 빠르게 꼼꼼하게 풀어 나갔다.
모르는 것에는 시간을 투자하지 않고 과감하게
아는 것들을 집중해서 공격했다.
아는 걸 틀리지 않는게 내겐 더 중요했다.

외국어 영역은 듣기 평가부터 왠일인지 잘들리는 것
같은 건 나만의 착각이겠지..
들뜨지 말고 신중하자를 다짐하며 문제를 풀어나갔다.
아는 단어들을 중심으로 앞뒤 문장을 이해하고
해석한 뒤 답을 채워나갔다.
자신없는 문법들은 to부정사나 동사원형
if만약절 등 익숙한 것들에 집중하며
시험에 가장 많이 나왔던 것들을 공략하자.
찍기의 기술이다. 혼자 되뇌며 시험을 치렀다.

마지막 시험이 끝나고

다른 아이들이 주섬주섬 가방을 챙기고,
삼삼오오 머리를 맞데고 서로 아는 답을 맞춰보는 등
수다를 떨었지만
나는 정신이 몽롱하고 피곤함이 한 껏 밀려왔다

겨우 밀어넣었던 점심마저 체한건지 명치가 조여왔다.
식은 땀이 이마에 맺히는 듯한 착각이 들 만큼
이마가 쨍하게 차가워지는 듯 했다.
몸에 기운이 빠져나가고
터벅버턱 가방을 둘러메고
시험장 교문을 빠져나가자 아빠의 차가 저 멀리보인다.

눈은 이미 녹아서 바닥은 말라있고,
그늘 진 가장자리에만 젖은 눈이 조금 뭉쳐있었다.
아빠는 내가 나오는 것을 보곤 차에서 내려
반가운 얼굴로 맞이했다.

"고생했다. 이제 집에가서 푹쉬어~
이미 지난 것들은 걱정하지마 어차피 변할 건 없으니까"

"응"

나는 대답을 하곤 차에 올라탔다.

시험장으로 갈 때는 꽤 오래 걸렸던것만 같은데
집에 돌아오는 길은 눈 깜짝 할 사이에 돌아온 것 같았다

집에 돌아오자마자 나는 궁금증 가득한 얼굴로
나의 눈치를 살피는 가족들을 뒤로하고

"나 좀 잘께" 하며 방으로 들어갔다.

가채점 정오표가 나왔다
아이들은 앞 다투어 자신의 답안지를 맞추어 보았다.
나는 시험이 종료되기 전에 시험지에 표시한 답 말고
혹시 모를 답안지 오표기가 있을 것을 대비해
시험지 뒤에 답 번호만 5개 단위로 적어둔 것을
기준으로 정답을 맞추어 봤다.

언어영역의 관건은 뒷장의 지문을 제대로 검토하지 못하고 찍듯이 문제를 보고 빠르게 답을 체크했던 것에서
얼마나 틀렸는지가 중요했다.
어쩌면 지문 1개에 딸린 4-5문항이
다 날라갔을수도 있는 상황이니까..

그런데 이게 왠일인가..
맞고, 맞고, 맞고..
3페이지에 달하는 마지막 10문제가 모두 맞을 확률이
과연 얼마나 될까??

다 맞췄다.

언어영역 만점이라니 이게 가능한 일인가??
자신있는 과목이긴 했어도 모의고사 때도 한번도
본적없는 점수다.
120점 만점.

그리고 시험시간 중 최초로 잠이드는 바람에
문제도 보지 않고 답안지에 찍어서 마킹하고
시험지에 급하게 옮겨 적은 수리영역답을
맞춰볼 차례이다.

평소 완벽한 수포자이지만 거의 절반을 찍다 싶이한
나는 35점만 넘으면 좋겠다는 심정으로 채점을 해나갔다.

이상한데? 푼게 다 맞았다..
찍은 것도 제법 동그라미가 쳐졌다..
이상한데? 내가 잘못 채점했나?
다시 채점해도44점이다.
80점만점에 44점이면 나쁘지 않다.

수탐ll와 외국어 영역은 평타이고,
외국어 영역이 평소보다 6~7점이 높게 나왔다.
이 정도면 나쁘지 않다.

시험 후 일주일이 지나고
가채점 성적표가 발표되었다.
선생님은 자신이 채점한 것과 점수차이가 나는 사람은
말하라고 했고 나는 손을 들었다.
왠지 모르지만 내가 가채점한 점수보다 7점이 높았다.

교무실에 가서 답안지와 대조를 해보며
다시한번 나는깜짝 놀랄수밖에 없었다.
찍기를 했던 수학 뒷부분 답안지를
밀려쓰는 바람에 수학이 무려 7점이나 올라갔다.
이럴수가 있는건가? 이게 가능한 일인가?
운에 더해 수학에서 두 문항은
답을 잘못 설정하는바람에
모두 맞게 해준 두 문항이 포함되었다.

수포자인 내가,
수업시간에도 졸아 본 던도 없던 내가
심지어 수능을 보다 잠이 들었던 내가
어쩔수없이 답안지만 보고 찍었던 마킹이
밀려 마킹되는 바람에 틀렸던 것이 맞고
맞았던 것도 맞을 확률이 얼마나 될까?
늘 최선을 다해 풀었던 수학점수보다
가장 높은 점수를 얻는 운을 얻다니.
3등급이 웬말인가?

언어영역 만점에 수학 3등급,
모든 아이들이 평소보다 점수가 높게 나오긴 했지만
모의고사 평균보다 30점이 넘게 높게 나온 경우는
흔하지 않았다.

이걸 고생한 보람이라 하기도 뭐하지만
나의 수능은 그렇게 행운을 가지고 왔다.

잔뜩 긴장하고 어색하기만 했던 기억과
아버지의 따스한 말없는 위로로 가득했던
함박눈이 내리던 그날은 그렇게 지나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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